[영화추천]<맨체스터 바이더 씨>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영화의 자세

여기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의 심연에 빠진 한 남자가 있다. 상실의 아픔을 다룬 몇 편의 영화를 봤지만 <맨체스터 바이더 씨>의 주인공 ‘리’처럼 통째로 마음이 아픈 사람을 모른다. 평생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진 채 살아야 하는 사람은 어떤 지옥을 헤매고 있을까? 영화는 냉정할수록 담담하게 그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아주 한순간에 일어났다. 리(リー)는 잠든 가족을 위해 난로에 장작을 넣은 채 근처 가게로 맥주를 사러 나간다. 20여 분의 시간이 흘러 집에 도착한 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불길에 휩싸인 집이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관들이 1층에 있던 아내는 구하지만 2층에서 자고 있던 세 아이는 아직 구하지 못하고 있다. 타다 남은 잔해 속에서 아이들의 시신을 수습해 올 뿐이었다. 이 사건으로 리챈들러라는 남자의 삶은 정지됐고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 폐허가 됐다. 리(リー)는 이전 생활로 돌아갈 수 없었다. 고향 맨체스터를 떠나 보스턴에 정착한 그는 물건을 고치는 잡역부로 살아간다. 온갖 것을 고치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어쩔 수 없는 아이러니 속에서 이형택은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있다. 구부정한 어깨와 공허한 눈빛, 표정 없는 얼굴은 그가 견디고 있는 고통의 무게가 얼마인지 가늠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책감 끝에 리가 선택한 방법은 고립이었다. 철저히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지키며 세상과 거리를 뒀다. 뿌리 깊은 죄책감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던 리는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형벌이었다. 오랫동안 묻어둔 감정이 슬그머니 수면 위로 올라올 때면 술로 잊으려 하고, 누군가 만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욕을 하며 싸운다. 그러나 날이 밝아 술이 깨면 다시 저주받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 감정을 폭발시키고 타인에게 무례하게 행동함으로써 슬픔을 잊으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많은 시간이 지나도 나는 여전히 그 시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면 고통에서 해방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씨는 자살 대신 그 대신 계속 살아가기로 했다. 죽음보다 못한 삶을 이어가는 것이 용납될 수 없는 죄를 지은 자신을 처벌하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어느 날 형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맨체스터로 돌아가지만 형은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됐고 형이 자신을 조카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지정했다는 유언을 듣게 된다. 하지만 고향에 머물며 조카를 돌봐달라는 오빠의 바람과 달리 만신창이가 된 리는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고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조카와도 사사건건 부딪히게 된다. 패트릭은 아버지 사후에도 아무렇지 않게 여자친구를 만나 밴드 연습을 한다.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없는지, 아직 상실을 실감하지 못했는지 패트릭은 평온해 보인다. 하지만 냉동고에서 언 닭을 발견하는 순간 추워 매장하지 못하고 영안실에 보관돼 있던 아버지의 시신을 떠올린 아이는 발작을 일으킨다. 패트릭은 가출한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마저 잃었다. 삼촌은 고향에 머물기를 원치 않아 오랜 추억이 담긴 아버지의 배와 고향까지 잃을 위기에 처한다. 잇단 상실은 아직 젊은 패트릭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이든 예고된 죽음이든 남겨진 가족이 감내해야 할 슬픔의 무게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리와 패트릭은 감정을 억누르고 태연하게 살아가지만 일상의 틈을 뚫고 수시로 슬픔이 찾아온다. 겉으로는 잔잔한 바다 같지만 작은 조약돌 하나에도 거센 쓰나미가 일어날 것 같은 위험성이 감돌고 있다. 도망치듯 떠난 고향에서 그는 마지못해 과거의 아픈 기억을 떠올린다. 가끔 파고드는 기억은 그를 다시 옛날 그날로 데려간다. 그곳에는 리(リー)가 전처 랜디(ランとも)와도 갑자기 재회한다. 자신과 함께 세 아이를 잃은 그녀는 울면서 말한다. ‘그동안 너무 미안했다’고. “아직 사랑한다”고 리는 “미안한 일이 아니다” “괜찮다”고 위로해준다. 아이의 죽음 앞에서 부부는 서로를 지탱할 수 없었다. 감내해야 할 슬픔이 워낙 컸기 때문에 서로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아이의 죽음 앞에서 반쯤 미쳐 온갖 끔찍한 말을 쏟아낸 랜디도,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아내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만리도 그땐 몰랐다. 서로의 상처가 얼마나 깊고 컸는지를.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만난 랜디 앞에서 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눈물도 흘리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말을 더듬는다. 그의 고통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고 뿌리 깊은 죄책감이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한 영화의 자세 때문이다. 감독은 무작정 타인의 고통을 위로하려 하지 않았고 배우들은 겪어보지 못한 고통을 충실히 연기했다. 연기라기보다는 상실을 경험한 사람 자체가 되어 견딜 수 없는 비극에 직면한 인물을 재연했다. 고통에 빠진 사람에게 어설픈 위로를 주는 것은 배려라기보다는 내 마음의 불쾌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진정한 위로는 내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는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배우와 감독은 한 남자의 아픔에 기꺼이 동행함으로써 고통을 나눴다. 〈맨체스터 바이더 씨〉는 마음이 무너져 내린 적이 있거나 상실의 계절을 지나고 있는 사람, 그리고 우리 모두를 가만히 안아주는 영화다. 한겨울 차가운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쐬며 서 있는 남자가 상실을 극복하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주지만 고통스러운 마음의 여정을 섬세하게 더듬는 카메라는 관객들의 마음을 달래준다. 겨울이 지나고 얼었던 땅이 녹았다. 형의 시신도 겨우 땅에 묻혔다. 삼촌과 조카는 여전히 어색하지만 형이 남긴 배에서 함께 낚시를 하는 두 남자의 뒷모습이 조금 쓸쓸해 보인다. 결국 남겨진 자들이 서로를 끌어안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소중한 것을 잃어도 우리는 계속 살아야 함을 남자는 받아들이게 된 것일까. 영화를 본 지 몇 년이 지났다. 마음의 폐허가 선명하게 드러난 리의 얼굴을 떠올리며 오래 골라 참았던 말들이 무심코 흘러나왔다. “당신은 이제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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